독서하다 한 마디

역사의 원전 - 1

공작등푸른돼지 2012. 5. 27. 20:21


역사의 원전 (보급판)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존 캐리 / 김기협역
출판 : 바다출판사 2007.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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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원전>

존 캐리 엮음, 김기협 옮김


<지식의 원전>이 마음에 들어서 같은 편자의 책을 선택했는데, 이번에는 번역의 질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 우리말 어순이 어긋난 문장이 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크레시 전투에서부터 유럽 귀족들의 작위가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번역되어 있다. 영국의 경우, 역사의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귀족은 주로 공작과 백작, 그리고 수적으로 남작들이 많은데, 이 책에서는 거의 후작들만 보인다. 분명 영국의 백작인 Earl을 잘못 옮긴 것이다. 그래도 내용 자체는 흥미롭다.

우선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을 보는 스페인인들의 시각을 보자. 그들에게 인디언들은 인육을 먹는 식인종이었던 것 같다. 식인족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폭력성이 두드러져 보였던지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이런 글을 남겼다.

"그들의 전쟁과 잔인성과 관련해 더욱 놀라운 일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 서로 전쟁을 해대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알기로 전쟁과 모든 난폭한 행동의 원인은 약탈과 지배욕인데, 사유재산도 없고 제국이나 왕국 같은 통치체제도 없으므로 그들은 소유를 위한 욕망을 알지 못한다."

이 부분에서 슈바이처 박사의 일화가 생각난다. 정확하게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아프리카 원주민의 한 부족장이 슈바이처 박사에게 유럽에서는 한 번 전쟁에 몇 명이 죽느냐고 물었다. 슈바이처가 수만 명이 죽는다고 하자 부족장은 먹을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죽이냐고 혀를 끌끌 찼더라지.

두 번째로 흥미로웠던 내용은 <삼총사>에 등장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인 버킹엄 공작 암살이 실제로 펠튼이라는 이름의 영국군 장교가 저지른 사건이라는 것이다. 원래는 영국왕 제임스 1세의 신뢰를 받던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가 실정을 저질러 의회의 탄핵을 받았고 그것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제임스 1세가 의회를 해산시키는 바람에 내전이 초래됐다니 우리가 유럽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걸까?

더불어 번역가로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사실도 발견했다. 1724년 윌리엄 스튜클리의 일식관찰 기록에서 그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시기에 손목시계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내가 알기로는 손목시계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68년이며 그것도 여성용으로 제작됐다. 손목시계로 번역된 부분은 원문의 어떤 표현이었을까?

그리고 블랙홀 이야기가 있다. 스티븐 호킹의 강연에서 중력조차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밀도가 높은 특이점, 블랙홀이 처음 소개됐을 때 영국인들은 나름대로 블랙홀을 상상했었다는데, 그 블랙홀 이야기가 이 책에 소개되어 있다. 인도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지배력을 다투던 시절, 영국 쪽에 호의적이던 벵골의 영주가 사망하고 그의 손자가 그 자리를 계승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입장이 뒤바뀌었다. 하루 아침에 죄인 신세가 된 영국인들이 문이 안쪽에서 여닫게 되어 있는 감방에 빽빽하게 수감됐는데, 너무나 인구밀도가 높은 나머지 서로 밀고당기다 사망하는 사람이 발생할 정도였다. 인도의 무더위를 생각하면 그정도 인구밀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상상이 가능하다. 너무나 많은 시체가 문 앞에 쌓여 있어서 그들을 수감한 사람들이 문을 열려고 해도 열 수가 없을 정도였다(안쪽에 시체가 깔려 있으니 말이다). 그 감방에서 생존한 사람이 기록한 글에 감방을 "블랙홀"이라고 불렀고 그 글이 영국에서 한동안 유명했기 때문에 물리학의 블랙홀에 영국인들이 그 때의 일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