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등푸른돼지 2013. 2. 26. 22:55


1차세계대전사

저자
존 키건 지음
출판사
청어람미디어 | 2009-03-09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세계적인 전쟁사학자 존 키건 1차 세계 대전의 원인부터 결말까지...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이미 존 키건의 원작을 번역한 몇 권의 책을 통해 충분히 실망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존 키건의 잘못이 아니라 번역가의 잘못이 크다. 특히 "정보와 전쟁"은 기술 분야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번역가가 작업을 맡았어야 한다고 감히 주장하는 바이다.

그런데 의외로 "1차 세계대전사"는 번역용어에 있어서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뒤로 갈수록 번역의 품질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파악하는 데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책을 읽는 재미까지 느끼게 해주었다. 군도나 제도와 같은 지리용어를 "떼섬"이라는 자기만의 용어로 옮긴 것은 번역가가 자기 역할을 넘어선 행위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주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으로 구분되는 유럽전역 위주로 서술됐다는 점에 실망을 느끼는 분들도 있지만 1차 세계대전의 원인과 결말에만 집중하고자 하는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그 방식이 집중을 흩으러뜨리지 않고 주된 논제만을 파고들어 지루하지 않게 책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다. 더불어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해외식민지까지 신경 쓸 필요 없이 유럽대륙에만 집중하기 위해 연합군이 독일의 해외식민지와 그것을 지키는 해군 분견대를 조기에 제거했기 때문에 대전 발발 후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유럽대륙 이외의 지역에서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출판사에서 내세운 것처럼 이 책이 1차 세계대전의 원인부터 결말까지를 다루기에는 좀 버거워보인다. 1차 세계대전에 돌입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이든 그 근본적인 원인은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인 30년전쟁까지 거슬러올라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존 키건도 굳이 원인을 세세하게 따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책 정도의 분량으로는 그것이 어림도 없다는 암시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황에서도 내가 이 책에 높은 평점을 주는 이유는 참 재미있는 표현을 많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최초 위기의 원인 제공자인 세르비아는 잊혔다. 전쟁은 이후 14개월이 지나는 동안 그 작은 왕국에 찾아오지 않았다."와 같은 표현은 심각하게 책을 읽다가 피식 실소를 터뜨리게 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전선을 설명할 때는 롬멜에 대한 이야기가 과도하게 강조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롬멜의 성공이 눈부시기는 하지만 그가 "보병공격"을 쓰지 않았다면, 일개 중위의 신분으로 그렇게 호의적으로 이런 성격의 책에 언급될 수 있었을까?

결론적으로, 이 책이 나에게 제공한 가장 큰 통찰은 1차 세계대전이 전투의 승리로 결말이 난 것이 아니라 연합군의 해상봉쇄로 결말이 난 전쟁이라는 것이다. 굶주림에 의한 질병으로 여성의 사망률이 증가했다는 부분이나 미카엘 작전에서 돌파에 성공한 독일군이 적이 버리고 간 식료품에 눈이 멀어 공세가 둔화됐다는 내용들은 독일의 사정이 얼마나 궁핍했는지를 보여준다. 그 결과 비록 러시아가 붕괴되어 사용 가능해진 마지막 전력으로 수행한 공세가 실패했을 때, 독일군은 승리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고 스스로 붕괴했던 것이다.

내 생각에 적을 경제적으로 마비시키는 전략이 확실하게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과연 최종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독일인들은 싸워서 진 것이 아니고 생각했고 그래서 독일군부는 한 번 더 싸워보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