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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는 대로 독후감/2014년

드디어 일리아스를 읽다.



일리아스

저자
호메로스 지음
출판사
단국대학교출판부 | 1996-12-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호메르스의 서사시 중 하나인 일리아스를 원전 그대로 번역하였다....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이 감상문의 제목에는 왜 "드디어"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했을까? 보통 우리는 그리스 시대와 로마 시대를 합쳐서 고전시대라고 하지만 보통 그리스로마 고전이라고 하면 보통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리스와 로마 두 시대를 통틀어도 그들 두 권을 떠올리니 얼마나 많이 알려진 책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를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래서 이 감상문의 제목에는 "드디어"라는 말이 들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유명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것이 고전이라는 혹자의 정의와 같이, 단지 많이 읽지 않는 책을 읽었다는 데서 "드디어"의 의미가 그치지는 않는다. 이번에 원전을 제대로 번역한 "일리아스"를 읽음으로써, 나는 그동안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에 대해 대단히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트로이>는 "일리아스"를 사실대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데 몹시 분노했었다는 점만 밝혀둔다. 더 떠들었다가는 내 무식만 탄론날 테니까.

나는 호메로스의 작품이 서사시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스스로를 판단하기에 시를 이해하는 능력이 몹시 떨어지는 관계로 중간에 포기하게 되는 사태를 우려했었다. 그러다 천병희라는 번역가가 그리스 작품들을 매우 맛깔스럽게 번역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큰 맘 먹고 고전 중의 고전에 도전하게 되었다. 단국대학교 출판부의 이 책은 나온지가 꽤 됐기 때문에 상태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지만, 시험삼아 몇 줄을 읽어 보니 장면을 묘사하는 비유적인 표현들이 매우 생동감 넘치고 재미 있었다. 파리조차 영웅이 될 수 있는 아래의 예를 보면, 풍자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어깨와 무릎에 힘을 넣어 주고,

  그의 가슴 속에 파리의 대담성을 불어넣었다.

  파리란 녀석은 사람의 몸에서 쫓기고 또 쫓겨도

  계속해서 물려고 덤비니, 파리에게는 사람의 피가 달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읽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한 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신들의 모습이었다. 그런 면모를 처음 발견한 것은 테트스와 제우스가 만나는 장면을 보고 헤라가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자 제우스가하는 말이다.


  그대는 참 이상하구려. 언제나 억측이나 하며 나를 감시하니 말이오.

  그래 봐야 별수 없을 것이며, 오히려 내 마음에서

  점점 더 멀어질 것이오. 그리고 그것은 그대에게 더욱 참담할 것이오.

  만약 그대가 말한 대로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 즐거움이 될 것이오.

  그러니 가만히 앉아서 내가 시키는 대로나 하시오.

  내가 그대를 향하여 이 무적의 팔들을 휘두르는 날에는

  올륌포스의 신들이 다 덤벼들어도 그대를 돕지 못할 것이오.


남편을 질투하는 여신도 적응이 안 되지만, 가정폭력범을 연상케 하는 제우스의 이 대사도 심히 거슬렸다. 게다가 신들은 자기들끼리 무슨 파벌이라도 있는 것처럼 트로이아와 그리스를 두고 서로 편이 갈라져 나중에는 자기들끼로 서로 대적하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제우스는 심히 기뻐했다니, 이것은 자기 권력을 노리지 못하게 경쟁자들을 서로 분열시키는 권력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더욱 웃기는 것은 비록 다른 신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인간의 창에 찔려 아파하는 신들의 망신스러운 모습이다.

이렇게 우리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게 만드는 이런 신들의 모습이 어찌보면 그리스인들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이 세상은 인간의 두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다. 아마 그런 일을 설명하려면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있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인간 세상의 모든 일들은 사실 신의 의사가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초월적인 존재가 개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삶은 이다지도 모순투성이인가?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결점이 많은 그래서 매우 인간적으로 보이는 신을 생각해냈나 보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신보다는 어쩌면 이런 신들이 더 합리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실 아킬레우스이다. 모든 이야기의 흐름이 분노한 아킬레우스가 다시 무구를 갖추고 헥토르를 죽이러 나서는 데 맞춰져 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사람은 헥토르이다. 아킬레우스를 끌어내야 하는 인물로서 헥토르의 활약이 몹시 중요했기 때문에 그리스 측에서는 여러 영웅들이 나름대로 활약을 보이지만, 결국 그들을 저지하는 트로이아 쪽 인물은 헥토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헥토르는 이런 중요한 역할에 비해 상당히 못난 모습을 보인다. 자기 쪽의 중요 인물들이 그리스의 영웅들에게 살해 당해도 그들의 복수를 해주지 못하며 가끔은 자기 자신이 두려움에 빠져 전장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아킬레우스와 마주치는 순간 도주해서 그에게 쫓겨 성주위를 세 바퀴나 돌지 않는가! 영웅적인 아킬레우스와 비겁한 헥토르, 아마 그리스 신화는 아킬레우스를 높이기 위해 헥토르를 낮춰야 했나보다.

요즘으로 시각으로 보면 악당이 주인공만큼 강력해야 재미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일리아스"를 읽는 이유는 이런 전반적인 줄거리가 가진 약점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일화들이 너무나 현실적이서 지금도 우리를 납득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용기는 두려움을 아예 모르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알면서도 극복할 줄 아는 것이다. 질 것을 알면서도 아킬레우스에게 맞서려는 아게르노의 독백처럼 말이다.


  아아, 내가 만일 강력한 아킬레우스를 피해

  다른 사람들이 겁에 질려 쫓기고 있는 곳으로 달아난다면,

  그래도 그는 나를 따라잡아 허약한 자처럼 죽이고 말겠지.

  하나 만일 내가 이들을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에게

  쫓기도록 내버려 두고 다른 길로 해서 성벽에서

  일로스의 들판으로 급히 달아난다면, 그리하여 마침내

  이데 산의 골짜기에 이르러 덤불 속에 숨는다면?

  그 때는 강에서 목욕하고 땀을 식히고 나서

  저녁에 일리오스로 돌아올 수 있겠지.

  하나 무엇 때문에 내 마음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는 도시에서 들판으로 달아나는 나를 알아보고

  빠른 걸음으로 뒤쫓아 와 나를 따라잡고 말 것이고,

  그 때는 죽음과 죽음의 운명을 피할 길이 없겠지.

  그는 모든 인간들 중에서 월등히 강하니까.

  그러나 만일 내가 도시 앞에서 그를 향하여 나아간다면?

  그의 살도 날카로운 청동에 뚫릴 것이고, 그의 안에도 목숨은

  하나밖에 없겠지.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도 역시 죽을 운명이라고

  하지 않는가, 비록 크로노스의 아드님께서 그에게 영광을 내리시지만.


과연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인간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고민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진정한 용기가 아니겠는가? 일리아스는 그런 이야기를 해주기 때문에 몇 천년이 흐른 지금 읽어도 여전히 재미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