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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는 대로 독후감/2013년

장황했지만 누구에게나 필요한 이야기



전투의 심리학

저자
데이브 그로스먼, 로런 크리스텐슨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13-05-1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전투의 심리학』은 20년간 미 육군에서 복무한 예비역 중령인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우연히도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날은 2차 연평해전 11주기였다. 이 책에서 과도하게 긴장된 상태에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진 신체의 반응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 월드컵의 열기가 한창 달아올랐던 그 날에 교전소식을 전하는 뉴스속보를 보면서 내가 처음에 떠올렸던 생각들이 다시 기억났다. '해군에 복무할 당시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 같았던 전투배치 훈련이 실전에서 이렇게 조건반사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구나.' 그래서 한 편으로는 이런 중대한 사건이 월드컵에 파묻히는 것에 분개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래도 군대의 훈련이 주먹구구식은 아니라며 안도했던 것이 당시 처음에 들었던 생각이었다.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대다수의 인간이 다른 인간의 위협에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은 이 책에서 처음 접한 이야기지만, 이제까지 모든 포식자의 눈 중에서 인간의 눈이 가장 무섭다는 속설을 들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쉽게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도덕적인 거부감을 갖는다는 사실은 납득이 가지만 심지어 전투상황에서도 소총을 사격한 인원이 15~20퍼센트 수준에 머물 정도로 강하다는 것은 정말 뜻 밖이었다. 군인이나 경찰이 된다는 것은 정말 큰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연습, 즉 훈련으로 그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반복적인 연습이 있어야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던 사실이지만, 연습이 잘못된 습관을 형성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접하게 됐다. 그리고 여기서는 육군의 과학화전투훈련단이 생각났다. 훈련단 소속 전문대항군이 자기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은 좋은데, 우리 육군에게 패배주의를 만연시키는 것은 아닐까? 훈련 전반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 역시 해군 전비전대에서 훈련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한 번은 가상훈련에서 선배가 정장인 고속정을 침몰된 것으로 판정하고 속으로 좋아 했던 기억이 있는데 어떤 훈련이든 절대 가볍게 임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과거에는 몰랐거나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새로운 사실들에 감탄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책이 좀 장황하다는 느낌을 받게 됐다. 마셜 장군의 연구 결과에서 나온 15~20퍼센트라는 수치는 시도 때도 없이 등장했고, 청소년들의 폭력적인 성향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책이 아니라 다른 책에서 다루어야 하는 내용인 것 같았으며, 어느 순간부터는 심리학이 아니라 도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덕분에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에는 이 책에서 언급한 총격전 직후의 어느 경찰관처럼 이제까지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이 하얗게 비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너무나 공감이 갔던 나머지 부록에 나온 '도덕성을 지키면서 강해지기 위한 원칙'들은 한두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이 다행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더불어 저자가 주장하는 내용이 사후의 디브리핑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 외에는 군대나 경찰이 적용하고 있는 기존 교육훈련 체계를 옹호하는 것 같아서, 아니 솔직히 내가 생각해 왔던 것과 너무나 비슷해서 군인 출신인 저자가 자신에게 익숙한 체계에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하기 위해 각종 사례나 면담 결과를 일정한 방향에 맞춰 해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는 점을 언급해야겠다. 어떤 구절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집어서 말하기는 힘든 것으로 보아 그것은 그냥 나의 의심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

이제 독후감을 쓰는 이 시점에서 책을 읽는 동안 느꼈던 불만은 거의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게 된 상황이라 나는 이 책에 별다른 불만은 없다는 것이 결론이 되겠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모든 내용에 심하게 공감했던 나머지, 어떤 부분에서는 표로 제시된 사실을 처음에는 잘못 읽었다가 나중에 표와 본문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껴서 앞에 제시됐던 표를 다시 확인해 보고 내가 처음에 표를 잘못 읽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이런 생각도 했었다. '맙소사, 나는 긴장도 하지 않았는데, 기억 왜곡이 일어났어.' ^^;;

사람마다 공포를 느끼는 대상이 다르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거의 모두 다른 사람의 공격성에 공포를 느끼기 때문에 다른 경우에는 긴장을 해도 멀쩡하게 회복될 수 있지만 인간으로 인해 느낀 공포는 한 인간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 적대행위로 인한 사상자보다 전투 스트레스로 인해 전선을 떠나게 된 병사가 더 많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로 흘려 들었던 사실이었다. 그것을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로 흘려 듣지 않게 해 준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우리에게 전쟁은 한 세대 이전의 기억이 되었지만, 당시의 참전 용사들이 아직도 많이 생존해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번에 걸친 소규모 해전이나 천안함 침몰, 백화점이나 다리의 붕괴로 인한 참사, 자연재해의 생존자 등등 생명이 위험했던 상황을 직접 경험했던 사람이나 그런 사람을 지인으로 두고 있는 사람은 아마 우리 주위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대하기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그런 일을 겪게 될 경우에 대비해서 이 책은 매우 귀중한 지침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 모든 일상적 상황에서도 이 책은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모르는 단어가 나왔을 때, 사전을 참고하 듯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읽어 보면 좋을 책이다. 다만 글이 조금 두서 없이 전개되는 것 같아서 최고의 평점은 주지 않았다.


사족으로 이 책에서 비거뱅 이론(bigger bang theory)를 읽은 뒤 우연히 케이블 TV에서 <불멸의 이순신>을 다시 보게 됐는데, 마침 명량해전 장면이 나왔다. 일본군은 조총을 쏘고 조선군은 화포를 쏘는데, 화포의 소리가 더 커서 조선수군이 승리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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